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문단 편집) == 북한 무장공비 == ||<-9>{{{#!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강릉무장공비구성원얼굴.jpg|width=100%]]}}}|| || 중위 김동현[*처형] || 상좌 김강훈[*처형] || 중좌 만일춘 || 소좌 신영길[*처형] || 소좌 류림 || 중좌 정영구 || 상위 김영일[*행방불명] || 소위 안경섭 || || 상위 김창복 || 대위 박태홍 || 대위 리영호[*처형] || 대위 김연호 || 대좌 김동원[*처형] || 소위 리광철 || 대위 김승호[*처형] || 상위 송동철[*처형] || 중위 량봉선 || || 대위 원흥천 || 소위 리영철[*처형] || 소위 김철진[*처형] || 소위 리철진 || 소위 변의정[*처형] || 소위 박정관[*처형] || 소위 정성훈 || 상위 한민섭 || 침투한 무장공비들의 얼굴.[* 단, 생포되어 귀순한 리광수는 제외되어 있다.]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모두 장교인 군관 계급이다. 이들 중 승조원들은 청바지와 운동복, 정찰조원과 안내원들은 복제품 국군 육군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복제된 육군 전투복은 멀리서 보면 비슷하지만 마감이 허술한 편이어서 가까이서 보면 차이를 알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무기로는 복제된 M16 소총, [[AK-47/해외#북한|북한제 AK 계열 소총]] 등을 사용했고 수류탄을 상당히 많이 사용했으며 [[M1911|45구경 콜트 권총]]도 사용하는 등 북한군이 주로 쓰는 공산권 무기 외에도 국군으로 위장을 하기 위해 서방 무기들도 많이 사용하였다.[* 실제로 동구권 무기들은 가성비는 좋더라도 정밀성 면에서 서구권 무기에 밀리는 경우가 있기에 주력 무기로 동구권 무기를 사용하는 국가들도 특수부대에 한정해 서구권 무기로 무장하는 경우가 소수 있다. 동독 [[슈타지]] 휘하 [[대테러부대]]가 당시 서독의 [[H&K MP5]]를 정식 수입해서 사용한 것이 예시. 동독과 서독이 남북관계마냥 서로를 적국으로 상정하지 않은 탓에 가능했던 일이다. 물론 이 사건의 경우는 성능보다는 위장의 문제로 국군의 총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잠수함 내에서는 무려 [[RPG-7]]까지 발견되었으나 다행히도 이걸 사용하지는 않고 잠수함에 두고 나왔다. 물론 들고 나왔어도 대군의 추격을 피해 도망치는 입장에서는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쓸모도 없으니 놔두고 왔을 것이다. 교전 시에는 부족한 탄약을 아끼려는 듯 교전 시 단발사격을 주로 하였고[* 이는 북파공작원들도 마찬가지다. 목적이 전투가 아닌 정찰이다 보니 최대한 짐의 무게를 줄여야 하므로 탄약의 경우 많아봤자 탄창 2~3개만 지급하기 때문에 탄약을 아껴야 한다.], 수류탄을 자주 사용하였으며[* 수류탄은 빗나가면 데미지가 없는 총알과는 달리 빗나가더라도 파편에 의해 어느 정도 피해를 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엄폐된 적을 상대로 위치를 이동하게 할 수 있으므로 이전부터 무장공비들이 많이 사용하였다.], [[망원조준경]]도 없이 [[기계식 조준기]]로도 장거리 저격을 해대는 등 공격 정확도가 높았다. 또한 난전 중에도 아군의 움직임을 보고 전방에서 공격해오는 아군보다는 측후방에서 기동하는 아군에게 먼저 응사를 하는 등의 상당한 교전 능력을 보였는데[* 특히 칠성산이나 연화동에서 벌어진 교전에서 이런 전술로 아군의 피해를 누적시켰다.], 이는 이들이 다수의 적을 상대할 시 무엇을 우선순위로 둬야 하는지에 대한 훈련을 고도로 받았음을 의미한다. 특히 대부분의 사상자는 위에 설명한 정찰조 2명과의 교전에서 발생하였는데, 이들의 유품 중에 자신들의 행적을 상세하게 기록한 [[수첩]]이 발견되면서 이동 루트라든지 행동방식 등이 알려졌고 이것들이 군 당국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어서 당시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 야간에만 이동했을 것이고 도로는 발각되기 쉬우니 산악지대로 다녔을 것이다 ↔ '''오히려 밤과 낮, 산과 도로를 구분하지 않고 이동하였다'''. 다만 아군의 검문소라든지 몸을 감출 수 없을 정도로 넒은 개활지 등이 보이면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야간을 이용해 이동하였다. 강원도가 인적이 드물다는 헛점을 이용해 포장도로를 타고 빠른 속도로 하루 평균 2, 30km를 이동하며 군부대의 포위망을 계속하여 뚫고 나갔다.[* 다만 이러다가 위에 나온 것처럼 지나가던 자동차에게 걸렸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동경로 근처에 국군이 있다 하더라도 과감하게 돌파하기도 했다. 작전 나온 경찰 간의 대화를 근처에 숨어서 기록하는 등[* 복장을 지적하는 대사를 자신들의 수첩에 기록함.]의 대범함은 놀라울 정도. 대신에 그만큼 여러가지 수단을 동원하여 흔적을 감추었는데, 개울가에서는 바위만 밟고 이동하여 흔적을 남기지 않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족적을 감추거나, 마찬가지의 이유로 비 온 직후에는 땅이 마를 때까지 이동을 하지 않았다. 이들이 가지고 다니던 물품 중 고무포대가 있었는데 국군 헬기가 나타나면 이걸 온몸에 뒤집어써서 바위처럼 위장하여 감시를 피했다고 한다. * 식량과 물품이 부족하여 굶주리고 지쳐 있었을 것이다 ↔ '''오히려 초기에는 먹을 게 넉넉했다'''. 식량의 경우 근처 민가나 텃밭을 털거나 [[나물]]과 [[열매]]들로 해결했고, 마침 당시 계절이 가을이라 지천에 먹을 게 있었다. [[옥수수]], [[감자]], [[양배추]], [[홍당무]], [[도토리]], [[달래]], [[머루]] 등. 보통은 생식했고 기회만 된다면 익혀 먹었다. [[콩기름]]이나 [[꿀]], [[고추장]] 같은 것도 털었다. 심지어는 [[강아지]]도 잡아먹었다고 한다. 의복 등의 경우 위에 설명된 살해한 민간인과 군인에게서 훔쳐 입었다. 이들은 대담하다 못해 무모하기까지 한 모습도 많이 보였는데 민가를 털던 도중 집주인이 차를 몰고 집에 들르자 민간인이 차에서 내린 틈을 타 차에서 [[담배]]를 턴다든가, 민가에서 [[라면]]과 냄비 등을 훔친 뒤 인근 야산에서 '''대놓고 모닥불을 피워서 끓여먹었거나'''[* 이때 아군 헬기가 나타나자 고무포대로 모닥불을 통째로 덮어서 연기를 가림으로써 노출을 피했다.] 심지어는 털었던 곳을 또 털기도 했다. 여담으로 민가에서 훔친 삼양라면을 끓여먹고 대단히 맛있다고 평가하면서 보름 만에 따뜻한 음식을 먹었다고 감격하는 대목도 있다. 그 뒤로도 근처에 인적이 없다고 판단되면 불을 피우고 숙영을 한다든가, 폐가나 축사가 보이면 몇 시간 동안 인적을 확인하고 들어가서 잤다. 비가 오면 훔친 비닐포대를 이용해 간이 텐트를 만들어 휴식했고 비트를 파고 잘때도 근처 버려진 [[무덤]]을 아래로 파고 들어가서 [[관(장례)|관]] 위에서 잠을 자는 등[*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무덤]]이란 것은 웬만해선 건드리지 않는다. 망자에 대한 결례이므로. 군대에서 부대 근처에 버려진 묘가 있을 경우 [[진지공사]] 등에 심각하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헐어버리지 않고 최대한 보존해 놓는 거랑 같다.] 몸을 숨기는 방법도 다양했다. 다만 작전 후반부에는 국군의 추적이 집요해지자 신발이 닳고 해져서 수선한다든가, 자신들에게 필요한 물품목록을 작성하는 등 보급품이 부족해지는 것이 눈에 띈다. [[총기수입]]할 기름이 없어서 콩기름으로 정비를 했으며, 끝에는 먹을것을 구하지 못해 국군이 먹고 버린 전투식량의 밥알을 모아둔다든가, 물을 구하지 못해 [[무(채소)|무]]의 생즙을 빨아먹기까지 한다. * 임무가 실패하였으므로 당황하고 사기가 저하되어 있었을 것이다 ↔ '''정 반대다'''. 애초에 이들의 침투 자체는 성공적이었고 그저 귀환 과정에 잡음이 생겼을 뿐. 애초에 이들은 잠수함이 있든 없든 바다를 통해 귀환하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군에게 들켜서 [[해안경계]]가 강화되고 잠수함을 뺏기자 어쩔 수 없이 잠수함에서 탈출하여 [[플랜B]]에 해당하는 육상 루트로 귀환을 시도한 것. 탈출하기에 급급했던 것도 아니고 포위망을 우회하면서 애초에 계획에 없던 정찰 지역을 훨씬 벗어나게 되자 근처의 군 부대나 교통시설 등을 지속적으로 촬영하는 등 본연의 임무에도 충실했다. 아군 경계병력이 있는 곳 근처에 숨어서 그들의 말을 수첩에 기록하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했다.[* 경계 중인 경찰 2명 중 선임으로 보이는 1명이 다른 1명한테 복장 문제를 지적하고 있었다.] 초반에 다른 공비들과 헤어진 후 북상하던 중 출발할 때 가지고 온 식량과 노획품들[* [[인삼]]도 있었다고 한다.]로 '''임무 성공을 자축'''하며 조촐하게 '''만찬'''까지 벌이며 하천이 있을 경우 [[목욕]]까지 하는 등 상당히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세뇌가 철저하게 된 요원들이라 그런지 아군과 교전하고 도피하는 이후에도 '남조선 괴뢰들에게 한방 먹였다'고 기록된것을 보면 사기도 출중했다. 다만 중반쯤에 접어들어서는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북상과 남하를 반복하다가 방향을 잃고 상당한 시간을 헤매게 되며 발각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심지어는 민간인을 고문하여 현지 지리들을 알아낸 뒤 살해했다. 도로 표지판이나 [[대한민국의 국립공원|국립공원]] 비석을 보고서야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기도 했다. 수첩에도 이때부터 좀 당황한 기색이 많이 보인다. 나중에는 [[단파방송|단파]] 송신기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지령을 청취했으나 해독장비를 파기해버린 뒤라서 해독하지 못했고 이것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결국 인제 부근에서 진지 공사를 하던 아군 장병에게 노출되었다. 이후 매복조와 교전 후 1명이 다리에 부상을 당하여 거동이 힘들어지자 남은 1명도 귀환을 포기하고 국군을 최대한 많이 길동무로 삼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첩의 기록을 보면 사살되기 이틀 전 날짜에서 끝나는데 마지막 기록의 내용들이 '''여기서 마지막 싸움을 하고자 합니다.''', '''지휘관 동지 죄송합니다. 꼭 조국의 품에 안기고 싶었습니다.'''등 [[사망플래그|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 쓸데없이 비장하다. * 피살자 11명 - 청학산 정상에서 총살된 채 발견된 11명. 계급으로 보면 가장 상관이라고 볼 수 있는 대좌 계급의 해상처장 등도 살해되었다. 대남침투를 위한 함정을 총괄하는 이들이 생포될 경우 많은 정보가 누출될 위험이 크기에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상처장과 해상부처장이 직접 잠수함에 탑승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하며 따라서 이 침투가 이 문서 서두에 나온 것처럼 김영삼 대통령 암살 등 상당히 중요한 특수 임무였을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살해 기준은 국군의 포위망을 뚫고 북으로 귀환할 전투력이 있느냐이며, 이 때문에 가장 높은 보직인 해상처장과 실세라 할 수 있는 정치지도원도 전투력(정확히는 사격 실력)[* 전투원들은 전원 저격수로서의 훈련을 오랫동안 받았기에 사격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다만 보직에 따라 처형한 것은 아니며 전투력이 있는 만일춘, 원흥천, 박태홍, 정영구, 류림 등 5명은 전투원으로 임무가 전환되었다. * [[대좌]] 김동원 (50, 해상처장) - 9월 18일 처형[* 북한 당국에 의해 1계급 특진하여 장령으로 추서됨]: 공화국 3중영웅 직함으로 애국렬사릉 안장. * [[상좌]] 김강훈 (48, 해상부처장)[* 이광수가 이 자의 이름을 몰라서 한동안 이름 미상이었으나 북한 측 자료에서 김강훈이라는 이름이 밝혀졌다.] - 9월 18일 처형 * [[소좌]] 신영길 (34, [[정치장교|정치지도원]]) - 9월 18일 처형 * [[대위]] 리영호 (29, 항해장) - 9월 18일 처형 * 대위 김승호 (31,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 상위 송동철 (31,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 [[중위]] 김동현 (27,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 [[소위]] 변의정 (27,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 소위 리영철 (27,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 소위 김철진 (27,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 소위 박정관 (27, 승조원) - 9월 18일 처형 * 생포 1명 * 상위 리광수 (31, 승조원, 조타수[* 가장 늦게 탈출해서 낙오했다고 한다.]) - 9월 18일 생포 * 사살 13명 * 중좌 만일춘 (48, 기관장) - 9월 19일 사살 * 대위 원흥천[* 이광수는 이 사람의 이름을 원홍철이라고 진술했으나 북한 선전물에 따르면 이광수가 잘못 기억한 것이고 이름은 원흥천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4, 통신장) - 9월 19일 사살 * 대위 박태홍 (31, 부기관장) - 9월 19일 사살 * 상위 한민섭 (30, 전투원) - 9월 19일 사살 * 상위 김창복 (29, 전투원) - 9월 19일 사살 * 중위 량봉선 (29, 전투원) - 9월 19일 사살 * 신원 미상 정찰조원1[*A 이광수는 이름을 몰랐으나 북측 자료에 따르면 리광철, 정성훈, 안경섭] - 9월 19일 사살 * 대위 김연호[* 이광수는 이 사람의 이름을 김윤호라고 진술했으나 북한 선전물에 따르면 이광수가 잘못 기억한 것이고 이름은 김연호였던 것으로 보인다.] (36, 전투원, 안내원) - 9월 21일 사살[* 뺨에 총을 맞고 사살당했다.] * 중좌 정영구[* 이광수는 이 사람의 이름을 정용구라고 진술했으나 북한 선전물에 따르면 이광수가 잘못 기억한 것이고 이름은 정영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류탄으로 사살당해서 시신 훼손이 심했다고 한다.] (42, 함장) - 9월 22일 사살 * 소좌 류림 (38, 부함장, 안내원) - 9월 28일 사살 * 소위 리철진 (28, 전투원) - 9월 30일 사살 * 신원 미상 정찰조원2[*A] - 11월 5일 사살 * 신원 미상 정찰조원3[*A] - 11월 5일 사살 * 행방불명 1명 * 상위 김영일 (30, 전투원) - 아래 문단 참고 귀순한 이광수와 발견되지 않은 김영일을 제외한 24명의 시신은 12월 30일 북측으로 송환되었다. 김동원을 제외한 대부분은 조국해방전쟁참전렬사묘에 안장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